2023-11-05 신방 전공자가, 부캠 출신으로, 강사 일 하다가, 개발자로 살아남기(-ing)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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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남은 자는 강한걸까

나는 어쨌든 혼돈의 개발 시장에서 살아남아 밥 벌어먹고 살고 있는 프론트엔드 개발자다. 전업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일한 경력은 내년이면 3년 차, 개발 분야 전체로 치면 5년 차에 접어든다. 내가 잘 나서 밥을 벌어먹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니다. 한 때는 솔직히 조금은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스타트업들이 감원 및 폐업한다는 소식, 또 지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임금체불 소송하는 걸 보며 내가 등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있는 건 그저 우리 회사에 투자금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됐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계속 일을 이어나가기에 나의 기술적 수준이 모자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내가 잘 나서는 아니다. 오히려 강박에 가깝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라는 말이 좀 더 진실에 가깝다. 이 노력 덕분에 나는 내가 모르는 더 많은 지식의 체계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문화생활에 투자하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어 생활인으로서의 내 정신은 더욱 편협해졌다. 학교 다닐 때 연 50권 넘게 읽던 책은 연간 5권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거의 개발 관련 책이었다. 종종 일 바깥의 가치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존하기도 바쁜데 저럴 시간이 어딨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러므로 강한걸까? 정리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더 큰 질문이 따라온다. 강함이란 무엇일까? 강한 자라고 무조건적으로 생존을 담보하지는 못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해서 생존하는게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겹게 여러모로 육체 / 정신 건강 해쳐가며 생존해야 하는 목적이란 또 무엇일까? 2023년도 이제 두달 남았다. 최근 다시 한번 크게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생겨(올해 원숭이 띠가 삼재라더니) 인스타 스토리를 정주행 했다.

2020년엔 미디어 쪽 진로를 완전히 청산하고 좋은 시기에 IT 업계로 넘어가는데 성공했다. 좋은 동료를 만나 일 열심히 하고 마냥 재밌게 살았던, 하루하루가 성취와 성장에 말 그대로 도취된 한 해로 기억됐다. 2021년은 일 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성과라는 걸 내며 일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한 깊은 고민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해였다. 2022년은 새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곧장 자부심을 가질만한 퍼포먼스를 내며 적응에 성공했으나, 연말에 가까워질 수록 초점을 잃고 헤메기도 했다. 그래도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충분히 성공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고 자평할 수 있을 만큼 잘해냈던 한 해였다. 반면 2023은 대체로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입지는 지난 해 보다 커졌고 성과도 배움도 있었지만, 업무 밸런스 분배나 사람 문제로 혼자 끙끙 앓으며 갉아먹힌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간 몸에 쌓인 독기를 다 빼내려면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고 삶의 속도를 늦추기에는 가라앉을까 겁나는 마음이 더 크다. 오히려 이러한 바쁨으로 인하여 어떠한 사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은폐하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강하다는 건 뭘까. 생존이란 뭘까. 생존으로 얻은 삶을 통해 나는 무얼 이루고 싶은걸까. 어떤 가치에 헌신하고 싶은 걸까. 처음 내가 이 분야에 매력을 느꼈던 건 하루하루 공부할 때마다 곧바로 내가 할줄 아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 점점 나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사 시절의 나는 비록 기술적으로는 많이 부족했지만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며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일을 계속해나갔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다시 다른 분야로 직업을 바꿔야 했을지도 모른다.

2. 당신은 나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마음

부트캠프에서 멘토 일을 하던 시절의 어느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제 내 관심사 따라 공부한 걸 내 맘대로 가르치고, 그걸로 칭찬을 받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고? 최고의 직장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생존에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돕거나 감사를 받는 일은 기분이 좋아지도록 진화하였다. 그래야 또 다시 기분 좋음을 맛보기 위해 누군가를 도와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본말이 전도될 때 발생한다. 좀 더 정확히는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못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 때가 정확히 막다른 길이다.

비전공 / 무경력으로 시작한 개발 부트캠프 멘토가 개발자 시장에 뛰어들 경우 그 경력이 그렇게 유의미한 의미를 갖기는 힘들다.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고 해봐야 완전 초보자보다는 낫지만 아는 거라고 해봐야 고작 한줌이다. 이 한줌을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커리어의 지속성을 담보해야 한다. 보기에 따라 뻔뻔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직업인으로서의 생존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심대한 구조적 결함이 되겠지만, 초보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개발 멘토는 도파민 폭풍에 휩싸여 그런 머리 아픈 일들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신입 멘토들에게, 혹은 부트캠프 멘토 제안을 받은 친구들에게 항상 ‘도파민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성취감을 넘어 나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수강생을 도파민 배터리로 여기고 자존감을 착취하는 경우까지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같은 실수를 저질렀고, 적잖은 수강생 분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당시 나의 근무 패턴은 이러했다. 아침 7시 기상. 송도에서 8시 버스 탑승해서 이동하는 동안 코드 리뷰. 10시 선릉 도착. 하루 종일 멘토링 후 밤 10시 반 퇴근. 귀가하는 버스에서 코드 리뷰. 12시 도착해서 씻고 야식 먹은 뒤 새벽 2시까지 다시 코드 리뷰. 주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적절히 조절도 했지만 대체로 삶과 일 사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다. 의도는 ‘내가 고연차 개발자들 보다 실력은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였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많은 감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이런 헌신에 감사하지 않거나 나의 노력에 호응하지 않는 수강생들에게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고, 생각해보니 때로는 감사를 구걸하기도 했던 것 같다. 본질적으로는 그들은 커리어 전환을 위해 배우러 온 고객일 뿐인데, 무슨 GTO 실사판이라도 찍는 양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 안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재현하려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붙어 가르쳐준다고 항상 감사를 받을 자격을 얻는 건 아니다. 정확한 지식을 효과적인 교수법을 통해 잘 가르쳐 전달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꽤 긴 시간을 태우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내 자신이 개발자인지 레크레이션 강사인지 자문하기 시작했고, 한 명의 개발자로서 생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당신은 나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알량한 마음에 불이 지펴지기도 하지만 그 때의 실수를 떠올리면 이내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좀 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어갈 수록 이런 부분은 점차 줄어들거다.

또한 이 시기 내가 시도하고 깨달았던 것들은 지금의 내 모습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주었다. 대학생 때 발표와는 담을 쌓았던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잘 떨지 않게 된 점이나, 새로운 업계에 진입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네트워크를 갖게 된 점도 좋았고, 일로서 성과를 낸다는 건 무슨 감각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도적으로 ‘업무’에 뛰어들었다는 점이 가장 소중했다.

3. 기자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20대는 거의 대부분 흑역사에 가까운 형태로 기억에 남아있다. 항상 불만과 화가 많았고, 인정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성과나 특별히 잘하는게 있지도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회고하자면 이 모든 참상의 원인은 나 자신의 비루함을 인정하지도, 욕망을 직시하며 실질적인 개선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까지도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 때 좀 더 일찍 머리가 깨지고 솔직하게 살았다면 지금의 나는 좀 더 친절하고, 많은 경험과 능력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신문방송학과와 경영학과를 복수전공 했다. 신문방송학과를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경영학과도 큰 뜻이 있었다기 보단 그저 주전공에서 듣기 싫은 과목들을 합법적으로 스킵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 정도로 활용했던 것 같다. 기자나 PD나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스펙을 쌓아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수시 입학한 친구들을 보며 나이브 한 내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곤 했다. 나는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걸까? 언젠가 학교로 취업 특강을 왔던 같은 학과 출신 선배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했다. 잔뜩 비뚤어져 있었던 당시의 나는 “그건 좋아하는 게 있는 당신 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 혹은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그게 취업이랑 상관 없는 경우가 더 많은데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 편하게 얘기하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흘러 졸업 학기가 다가오고 여전히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그래도 어영부영 블로그에 글써서 따봉 받는데 재미 느끼고 음악 평론해보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고, 고민이 시작됐다. 아무리 봐도 평론가들은 음악 오타쿠로 태어나 아는게 너무 많고, 새로 나오는 음악들도 지치지도 않고 듣고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평론 일만으로는 입에 충분히 풀칠하는 게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곤 “그럼 돈 주는 글쓰기는 기자가 가장 만만해보이니 기자나 좀 해보지 뭐” 라며 급발진으로 언론고시반을 들어가게 된다.

이 당시 나는 성취라는 걸 어떤 식으로 이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기자가 되려면 기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정말 기자가 되고 싶었다면 기자라는 업의 본질을 고민하고 그들이 실무에서 어떤 능력들을 발휘하여 하루를 살아내는지에 궁금증을 가져야 했다. 나는 건방지게도 삐딱하게 앉아 이 시대의 언론이 기득권과 얼마나 부적절한 공생을 하고 있는지 논평하는데만 시간을 보냈다. 책상에 앉아 쓰라는 글만 썼지 진짜 내가 누군가를 취재해서 스토리를 뽑아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머리에 힘만 잔뜩 들어가 있었을 때가 ‘구글 이노베이션 저널리즘 스쿨’을 수강할 즈음이었고,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현실을 맛보았을 때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디일렉에 기자로 취업해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를 취재해야 했던 때였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 써왔던 글은 철저히 쓸모가 없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나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떠드는 가십들, 혹은 내가 가진 가치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이 많아봤자, 기자로서의 내가 써야하는 글에 대해서는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단 한칸도 오른쪽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간신히 써낸 문장조차 빨간 펜이 죽죽 그여 반의 반으로 줄어들기 일쑤였다. 나는 사실 직업인으로서 제대로 된 경험도 무기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우물 안에서 세상을 논하고 있던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무력감에 빠졌다.

기자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자는 취재원을 만나 새로운 가치 있는 사실을 발굴해냈을 때만이 키보드 앞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직업이었다. 기자로서 가장 쓰기 힘든 글은 종합 기사가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이트 기사다. 단 한줄 짜리 스트레이트 기사를 내가 쓸 수 없었던 건, 글자를 칠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업계에 대한 지식도, 취재원도 없는 신입 기자인 내가 가치 있고 새로운 사실에 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템이 없었던 나는 뭐라도 나올까 매일 새벽 네시 넘겨서까지 재무재표라도 붙들고 있었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없었고 여섯시가 되면 어김 없이 출근 준비를 시작하고 아침 보고를 위해 출근길 기사 검색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의 절망을 견디고 견뎌 더 많은 시간을 버텨내면 언젠간 선배 기자들처럼 능수능란하게 기사를 쓸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글쓰기를 싫어했다. 나는 사실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소식들에 관심이 크진 않았다. 그냥 나를 표현할 수단으로써 글쓰기를 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 의존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은 내 입장에서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선택지였던 셈이다. 이윽고 수환 차장님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 뚝뚝 흘리며 퇴사를 했다. 그리곤 아무도 시킨적 없지만 꾸준히 해왔던 일을 생각해봤다. 중학교 때부터 랩을 조금 했었지만 내년이면 스물아홉인데 그 나이 먹고 음악을 시작하는 건 좀 아닌거 같았다. 남은 선택지는 코딩이었고 이것 만큼은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개발자 분의 소개로 덜컥 부트캠프에 등록했다. 680만원 정도를 부모님께 빌려야 했는데 대단히 당혹스러워 하셨던게 기억난다. 그땐 금전 감각도 없었어서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랐다. 그렇게 부트캠프에서 3개월을 보내고 한달 가량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매일매일 성취감에 절어 살아도 좋았다고 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도 쓸모가 있고 하고 싶은게 있구나. 이게 사는거구나. 2020년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제서야 내 자신에게 솔직해질 결심을 조금씩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결심의 시기가 1년만 조금 뒤로 미뤄졌더라면, 혹은 그보다 1년만 앞으로 당겨졌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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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ngmotmi

'내가 원하는 건 문학이 아닌 기쁨이다.'